
지난주 우리 곁을 떠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신 고 김준곤 목사님의 장례식과 장례예배를 보며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10월 첫 주는 고 김준곤 목사님 추모 기간으로 어제 다운 월요모임에서는 참석하신 다운선생님들과 함께 자신에게 김준곤 목사님과 CCC에 대해 나누며 공감하고 눈물 흘리며 애도하는 시간을 갖았습니다.
나눔 가운데 하나님과의 첫 사랑을 이야기 하며 채플 설교 중에 눈물 흘리셨던 김준곤 목사님과 백문일답의 감동과 도전, 민족복음화를 외치며 부르신 곳에서 더욱 열심히 살자 다짐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았답니다.
김준곤 목사님과 CCC가 있었기에 지금의 아가페와 월요모임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주님을 믿는 한 사람의 영향력.. 김준곤 목사님을 추모하며 김안신 일본 선교사님이 CCC 간사게시판에 올려주신 글도 올려봅니다.
나의 사부 김준곤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2009년 10월 1일, 첫 번째 제자 김안신 목사 올림
제 삶 가운데서 가장 큰 사건을 꼽는다면 그것은 첫째로, 제가 예수님을 만난 기적이고 두 번째로 예수님을 전해주신 김준곤 목사님을 만난 은혜였으며 세 번째로 김목사께서 창설하신 CCC와의 숙명적 만남이었습니다. 한국의 1인당 GNP가 78달러였을 58년 3월에 저는 대학생이 되었고 그 해 10월 한국CCC 창설 준비 모임이 광주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농대에서 밀알회가 조직되어 학내뿐만 아니라 광주교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을 때 “대학생 하나 참석시키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으신 윤남중 목사님께서 밀알회 창립 멤버였던 제게 연락하여 첫 모임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저는 한국CCC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체험한 저는 학우들에게 전도하면서 겪었던 일화들을 편지로 보내드렸는데 그 때마다 김목사님께서는 이런 답장을 주셨습니다. “김군이 그렇게 복스럽게 자라가는 것을 보니 전도자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저는 전도자의 삶을 살면서 이 말씀을 100% 실감하였습니다.
5.16군사혁명 후 학보병으로 입대하여 544일간의 군복무를 마친 후 아직 재학생일 때인 62년 11월 30일부로 학생 간사의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전국적으로 4급 공무원 모집 때 합격, 졸업 전에 발령장을 받고 서울 본부로 인사하러 갔습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셔서 취직이 되었어요. 너무 감사하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글을 쓰고 계시던 김목사님께서 저를 쳐다보시면서 “뭐? 취직! 김군은 전도해야 돼!” 이 한마디가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 저는 발령장을 반납하고 “춥고 떨리고 배고픈 과”라고 일컬어지던 CCC의 간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7남매 장남이었습니다. 취직이 되자 시골마을에서는 축하잔치가 벌어질 만큼 기쁨이 넘쳤는데 직장도 아닌 CCC 간사가 된다고 하니 모두가 완전히 미친 놈 취급을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전도자의 삶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CCC 간사들은 생활은 없고 생존만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일컬어졌으며 진짜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프니까 잠이 오지 않아 아내를 부둥켜안고 1년이면 네 번 정도는 눈물로 밤을 지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부에서 간사 수련회 등이 있을 때면 김목사님께서는 제 손을 꼬옥 쥐시고 “김간사! 얼마나 고생이 많소!’ 하시면서 저를 바라보시는 눈동자에서는 굵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용기 백배하여 더욱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71년 대전충무체육관에서의 1만 명 전도훈련, 72년 춘천성시화 운동, 엑스플로 74등 큰 집회들이 있을 때마다 준비하고 기획하는 일을 제게 맡기고 진행케 하셨습니다. 특히 엑스플로 74 훈련교재의 편찬과 합숙자 323,419명을 33,000개의 순으로 나눠 전도요원화 할 수 있도록 훈련을 제게 맡겨주신 것은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은총이었습니다.
제가 이날까지 전도자로 살아오는 동안, 김목사님의 친필 편지를 68통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45년 전인 64년 6월, 동경에서 제게 보낸 편지는 지금도 제 일기장에 넣어두고 피곤할 때마다 읽으면서 다시 힘을 얻곤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김군! 나같이 때묻고 낡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순정을 지닌 인격의 동정이여 처녀성이여 나는 김군 앞에 업대어
절해도 모자랄 고물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내 진정으로 그
리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략)…
이젠 나는 주님의 수집은 시골 가시네 같은 진정으로 그리운 사람들
을 불러보고 주님을 우러러 가슴 설레일 수 있습니다.
지저분한 사람들만 사는 마을에 아직도 더럽히지 않은 우리들의
푸렌스시여 고독과 빈곤을 자매삼고 살 수 있는 영감이여- 나는 인생 시를 쓰다가 미완성으로 죽어 가드래도 고마운 나의 적자여 아우여 내가 못 다한 얘기와 노래를 부르며 황폐한 땅 위에 부활의 소식을 전하소서. 안녕히!”
제가 CCC의 일선을 잠시 떠나 협동 간사의 신분으로 14년간 목회를 할 때도 여전히 김목사님께서는 저의 스승이셨고 아버지셨습니다. 저의 현장에는 코치로 맨토로 언제나 김목사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90년 10월 1일 저를 일본CCC의 선교사로 파송해 주시고 일본선교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늘 격려와 도전을 주셨습니다. 김목사님은 한일국교가 정상화된 60년대 초부터 일본선교를 위해 많은 시간과 재정과 인적 자원을 동원했어도 열매가 없어 “일본복음화는 불가능 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계셨습니다.
“한국, 일본, 중국 등의 복음화 없이는 세계선교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우선 문이 열려 있는 일본부터 복음화 하자는 생각으로 91년 7월에 뉴라이프재팬2000을 기획하시고 그 해부터 일본에 여름과 겨울에 단기 선교팀을 보내주셨습니다. 일본 말을 못하는 어린 대학생들이 2주씩 전도하여 맺은 열매가 풍성함을 보고 받으신 자리에서 김목사님은 “아, 일본선교도 가능하구나!” 하시며 여러 번 눈물 흘리신 것을 저는 목격하였습니다.
또 지난 19일 오후 5:40분에 문병 갔을 때 사모님이 옆에서 지켜보고 계시는데 저를 위해서 이렇게 절절히 기도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김안신 목사를 위해 기도합니다. 딸들을 잘 키워 주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쓰임 받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김안신 목사를 볼 때마다 선교사들이 받는 복이 무엇인지 알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특히 두 딸을 일본선교사로 부르셔서 사역하게 하심을 깊이 감사합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제 기도를 들으시고 불치병에서 살려낸 셋째 딸 세영이가 오끼나와에서 남편과 함께 일본 현지인 선교에 힘쓰게 하심을 깊이 감사합니다.
제가 58년 10월 광주에서 한국CCC를 창설할 때 대학생 신분으로 참석하여 내 제자가 된 후 학생 시절부터 대학생 전도에 힘을 쓰더니 졸업 후에는 한국CCC에서 간사로 부름 받고 종을 도와 학원전도와 민족복음화 운동을 전국화 시키고 대전 충무체육관에서의 1만 명 전도요원 훈련 강습회를 비롯하여 엑스플로 74 등 굵은 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준 이 종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김군은 전도해야 돼!’ 라는 종의 말 한 마디에 안정된 취직 자리를 포기하고 민족복음화를 수종 든 종이었습니다.
90년 선교사 파송장 하나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 가 주님 기뻐하시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모금 등 열악한 환경에서도 제가 시작한 뉴라이프 운동을 맡아서 일본열도에 새로운 영적 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 다시금 감사합니다. 이 종을 더욱 귀하게 쓰셔서 기어이 일본열도에 그리스도의 계절을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종의 사역을 통해 오끼나와에서 북해도까지 일본 열도의 구석 구석마다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고 일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여주시옵소서.
일본이 복음으로 변화되어 세계선교에 쓰임 받는 나라가 될 때까지 결코 김목사가 일본선교를 포기하지 말게 하시옵소서. 건강을 지켜주시고 사역에 필요한 모든 재정도 넉넉히 채워주시옵소서. 결코 일본선교 전선에서 물러나지 말게 하시옵소서. 일본교회 지도자들을 더욱 겸손하게 섬기면서 복음을 수출하는 나라를 만들게 하시옵소서. 한반도에서 건너 간 우리 조상들의 후손인 일본인 모두가 복음으로 변화될 그날을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8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가 지켜본 김준곤 목사님은 눈물의 종이었습니다. 그 눈물들을 다 모은다면 자기의 눈물로 침상을 띄웠다는 다윗의 그것보다 수 백배는 더 될 것입니다. 지금 김목사님이 흘리신 눈물들이 삼천리 금수강산과 지구촌을 촉촉히 적시고 있습니다. “CCC는 교단이 될 것이다. CCC는 우리 교회의 대학생들을 빼앗아 간다. 하나님의 사랑부터 가르치는 사영리는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대학생 몇 천명을 거느린 작은 학생단체에서 민족을 예수로 혁명한다니 건방지다!” 등등 한국교회 대 교단 중진들의 책망과 비판을 들을 때마다 우리 간사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김목사님은 통곡하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셨고 우리 모두는 가슴을 치며 함께 울었습니다. 저는 늘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또 김목사님은 기도와 금식의 종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62년 초 한겨울, 삼각산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하신 이후, 제가 직접 동참한 76년 12월, 19명의 간사들과 40일 금식을 하신 후, 교계의 분열이나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자주 금식을 하셨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김목사님이 금식하며 드리신 기도의 향기는 지구촌 24,000종족 68억 만민의 가슴에 향기로 전달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은혜의 보좌 앞에 상달되어 먼저 간 성도들이 그 향기에 취해 있을 것입니다.
70년 연말에 200만 신자를 가진 한국 교회는 김준곤 목사님의 민족복음화 운동에 힘입어 90년도 말에는 1,200만 신자를 가진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20년 동안에 신자의 수는 6배로 성장하였고 한국교회의 재정은 1,000퍼센트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부흥의 한 가운데서 김목사님은 심장처럼 묵묵히 일하셨습니다.
아아, 사랑하고 사모하는 우리들의 믿음의 아버지요 스승이신 김준곤 목사님! 지금 우리 곁에 목사님은 안 계시지만 김목사님은 우리 제자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부르짖으셨던 그 모습을 간직한 채 못 다 이루시고 남긴 꿈을 기어이 이 시대에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 지구촌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는데 앞장 설 것입니다. 아 사부님이시어 그 나라에서 편히 쉬시면서 제자들의 시역을 지켜보시고 기어이 이 땅에 성취될 그리스도의 계절을 기대하시옵소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서 저희들을 격려하시고 도전해 주실 줄 믿습니다. 기어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도록 더욱 분발할 것을 다시금 다짐 합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주님 품에서 편히 쉬시면서, 위로를 받으시면서 저희들의 사역 현장을 지켜 보시며 계속 응원해 주십시오. 이 시대에 반드시 그렇게 애타게 소원하셨던 그리스도의 계절을 오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