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장 - 노제현 선생님^^
마태복음(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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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례 요한의 출현과 활동(1-12) 2.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세례(13-17)
우리는 마태복음 3장에 들어서자마자 세례 요한이란 사람의 갑작스런 등장을 대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는 요한의 탄생과 성장에 대해 침묵하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이미 세례 요한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여년 동안 유대인에게 선지자가 없었는데, 하나님의 때(1절 그 때)가 되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세례 요한은 성경에 탄생이 계시된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며, 요한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또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으로 이 이름은 천사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한 것입니다(눅1:13).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자기 차례를 따라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시간에 주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요한의 태어남을 예고해 준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 준 천사는 태어날 아들에 대한 사명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1:17)'고 한 것입니다. (1)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그에 대하여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한 사명자가 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너희는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낮추고 주님만을 높이는 사명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시러 오실 때에도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겠거늘'이라 하면서 그의 겸손을 보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대망해 온 메시야인 줄 안 후에는 더욱 자신을 낮추고 '그는 흥하여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무한히 낮추었으나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하시며 그를 높여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겸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 받은 죄인들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받은 용서를 증거해야 할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증인이 자신을 높이면 주님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증인들의 할 일은 세례 요한처럼 자기는 낮추고 주님만을 높이는데 있습니다.
3. 세례 요한의 선포와 활동
이 세례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전파한 그의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할 때 처음 외치신 복음의 내용이 이 세례 요한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7)'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전할 복음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란 메시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은 영원히 변치 않으며 그 핵심적 내용은 만민에게 동일한 것으로 그 중심 내용이 '회개와 천국'인 것입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가까웠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가장 큰 자극제이자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천국이 멀리 있다면 굳이 빨리 회개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세상 사람들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직 죽을 날이 멀었으니 세상 삶을 즐기다 죽을 때쯤에 믿으면 된다고.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모르며, 또 천국의 실제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오’는 ‘마음을 바꾸다’, ‘무슨 일을 후회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머리로만 계획을 바꾸거나 후회하는 것이 아니고 전인격과 행위의 철두철미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나아가 회개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신의 힘으로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도 인정해야 하며, 죄 용서를 받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죄의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다시 죄악의 길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이 방식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가치관의 대 전환이요 삶의 대 전환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가 있어야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믿을 수 있고, 가까이 와있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 무엇보다 이 하늘나라에 대한 사상은 세례 요한의 창작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귀에는 천국이라는 말이 매우 익숙한 말이며 구약에는 천국을 자주 언급하였습니다. 다니엘서의 한 곳에는 이 말이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하리라](단7:14) 이런 구약의 사상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기 위하여는 먼저 예수님 나시기 전의 유대교의 천국 사상을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교의 천국 사상에는 두 가지의 관점이 있습니다. 즉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천국관과 세속적인 천국관입니다. 종교적인 천국관은 외세의 통치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윗 왕조처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신정국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천국이 예기치 않은 때에 어느 나라도 항거할 수 없는 세력으로 갑자기 임하리라는 사상입니다.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이 천국사상이 종교적인 의미나 성격은 상실되고 다만 물질적인 호화로움과 정치세력의 팽창, 그리고 세속적인 유익을 소신껏 누릴 수 있는 세계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이 시대에 유행하는 세속적인 천국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그 사상을 시정한 일이 있습니다. 즉 야고보, 요한 형제가 예수님에게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다른 사람보다 일지기 운동을 했고(마20:20), 또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이 사상을 버리지 못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오니까](행1:16)하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지상적이고 정치적이고 비영적인 사실을 가지고 하나님나라를 기다렸나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천국]이라는 말은 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민족사상을 대표하는 한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 외침이 울려 퍼졌을 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은 이유는 이렇게 나름대로의 천국관을 가지고 이런 천국이 임할 것으로 생각하고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가 성립되려면 ‘국민, 영토,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도 이 세가지가 필요하다고 보겠습니다. 민주국가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나 천국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천국시민이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세계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천국을 언급할 때에는 이 세 요소를 모두 언급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느 한 요소를 강조하는 경우도 많이 있으므로 이를 잘 구별하여야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함으로 우리가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천국은 이 세상의 장막이 무너진 후 들어가는 곳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님으로 모시어 들일 때 우리에게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2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고, 현재 임하고 있으며, 종말 이후에 완성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은 중간시대 유대독립의 영웅 유다스 마카비우스가 헬라 정권으로부터 이탈하여 유대인 자주국가를 세우던 그런 인물의 기다림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그들 역사에 지대한 세력으로 전해지는 중요한 말이기도 했으나 그들의 강조하는 바는 지상의 정치적인 강한 국가에 관심을 모았고 하나님의 뜻을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빈약하였습니다. 이 천국사상의 정상적인 깨달음은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의 도를 깨닫고, 세례를 받아 천국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의 배경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그 이름에 해당한 나라를 선포하시고 세우셨습니다. 그는 재래의 메시야 사상을 대폭 시정하여 그의 설교 중심을 선교에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넘칠 정도로 강조하시고 여러 가지로 다양성 있게 가르치셔서 그 가르침을 간단하게 정의한다거나 단순한 문장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분명하고 중요한 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통치력과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력입니다. 이제 이 두 가지 점에서 천국사상을 생각해봅시다. 마음속의 하나님의 통치로서의 그 나라예수님이 천국을 선포하여 복음의 초석을 놓았을 때, 그가 뜻하는 바를 세가지 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첫째, 하늘나라는 민족주의적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며, 둘째,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셋째,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1) 도덕적인 성격: 천국사상은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친구들에게 어느 것이 사람의 원수인가를 모른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자기의 땅에서 마음대로 활보하는 외국 군대 로마가 원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참 원수는 로마나 그 군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을 활보하는 악마와 그의 군대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듭 이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떻게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서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 강한 자를 결박한 후에라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마12:19). 여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강한 자는 누구인가? 로마의 가이사가 아니라 사탄이지요.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시기를 [유대 온 땅을 다니면서 상한 심령을 치료하고 악마들을 축출하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가 이 땅에 임하여 세상의 강자 사탄을 결박하는 것이며 사탄왕국 파괴는 하나님 나라의 왕성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는 중에서 이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말씀하신 곳은 빌라도 앞에서 였구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지 아니하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고 하셨습니다. 인류사상 가장 큰 모순은 이 땅 위에 건설된 나라에 대하여 정치적인 야욕이 조금도 없는 예수님을 로마 정부의 대행자 빌라도가 그 로마와 싸우는 선동자라고 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이 지상국가가 로마의 기반으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로 세워지기를 열망하였는데 예수님의 언행 중에는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어주고자 하는 뜻은 전혀 비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이 그런 일을 의식적으로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아니했다] 이것이 바로 유대 민족주의 입장에서 볼 때 사형에 해당하는 발언이라 볼 수 있지요. [우리를 장차 다스리지 아니할 저런 자를 물리쳐라]고 군중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세계는 이 땅 위의 어느 영토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입니다. 사람의 가장 깊은 곳, 즉 우리의 도덕세계를 통치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성격: 천국사상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마음속에 바라던 나라는 오직 지상에 세워진 국가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핍과 곤고를 물리치고 저들에게 윤택한 환경, 생활의 평안을 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일로서 자신들을 물질생활에서 여유롭게 지내기를 바란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생각은 사탄이 바라는 방법입니다. [먼저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그 다음 여유가 생긴 다음에 영적인 높은 문제를 생각하라]는 것이라든지, [먼저 평안을 누린 다음에 복음을 들으라]는 방법 등은 사탄의 방법이지 예수님이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그의 예수님께서는 이 방법에 대하여 단연코 [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롬14;17)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천국 사상은 지상천국의 연장과 같이 생각하여 먼저 이 땅 위의 생활에 대한 관심을 더 크게 가져야 한다는 사회주의 사상적 경향으로 복음을 합리화 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사회주의 사상이 중요시하는 물질적인 요소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회가 등장하고 생활 환경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아름다운 환경을 이룬다 해도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새롭게 지음을 받고 그들의 인격이 썩어져 가는 죄에서 심령을 돌이켜 구원 받지 않으면 아름다운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회개하고 새로 지음 받은 사람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심령이 새로워지지 않은 사회의 유토피아는 가장 불행한 곳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 문제를 무시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참 종교는 언제나 사회 문제에 대하여 강한 발언권을 가지며 따라서 지도 이념을 가집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발견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불공평을 시정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며, 또 그것을 자기들의 신성한 의무로 생각합니다. 진실로 영적 문제에서 새로워진 사람은 사회를 개혁하는 십자군 편에 언제나 가담합니다. 먼저 할 일은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지요. 영적인 문제가 바로 이루어진 그곳에는 언제나 물질적인 문제도 바로 잡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물질세계에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입니다. (3) 실제적인 성격: 천국사상은 또한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천국을 공상적으로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 천국이 미래의 어느 시기에나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옛날 선조들이 바라던 그 천국이 지금 와서 이 땅 위에 실현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고향 나사렛 회당에 모인 무리 앞에 서서 하나님 나라의 복스러운 내림은 미래에 있을 것이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큰 음성으로 읽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마음이 상한 자는 위로를 얻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그리고 그는 책을 덮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17). 또 다른 날 그는 제자들에게 조용한 음성으로 [보는 눈이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나간 세대의 모든 왕들과 선지자들이 그들이 듣는 바를 듣고자 해도 듣지 못했고 보고 싶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찬란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하겠지요(눅 10;23). 예수님은 거듭거듭 저희 선조들과 그들이 이미 꿈꾸고 있던 하늘나라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그들의 영적 환상이 깨끗해지기를 강조하여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꿈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복음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모시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들이는 남녀 신도가 있는 곳, 그곳이 하늘나라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신앙함으로 돌연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바른 설명입니다. 그 나라는 이 나라와 다른 나라로서 영원한 세계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인간의 표면적인 모든 생활을 초월하여 그 중심에 임하는 나라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자로서의 그 나라 통치그리스도가 말하는 하늘 나라의 둘째 성격은 그 나라 사람의 마음만 통치할 뿐 아니라 그 세계도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서도 예수는 세가지 원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그 나라는 사회적이며 개인적이 아니다. 둘째, 그 나라는 우주적이요 지역적인 것이 아니다. 셋째, 그 나라의 완성은 최후의 결정이지 현재 완성된 것이 아니다. (1) 사회적 성격 나는 나의 정신전쟁을 쉬지 않으리라 어느 시인의 노래와 같이 기독교에서의 개인의 위치는 하늘 나라를 건설하는 한 용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성격을 가진 것입니다. (2) 우주적 성격 (3) 최후의 완성을 기다린다. 참고 유대교의 분파와 당과 운동들 이들은 종교적인 순수주의자들로서 B.C. 2세기의 "하시딤" (하나님의 충성된 자들)에서 발전하여 정치적인 일들보다는 종교적인 일에 전념해 온 집단이었다. 그들의 최고 관심사와 기쁨은 율법(물론 유전도 포함하여)을 낱낱이 지키는 데에 있었다. 이 표준으로 판단할 때 그들은 모범적인 유대인들이었다(빌3:5-6). 이 목적으로 그들은 가능한 한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아마도 필연적으로 이 같은 분리정책은 그들보다 못한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너보다 더 거룩하다"는 그들의 태도는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을 오늘날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사랑과 자비에 앞서 엄한 율법준수를 요구하고 메마른 율법주의자와 혼합된 이 오만한 태도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정통신앙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범한 오류와 교만과 무정한 생활자세를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의 영향은 그들의 숫자에 비하여 미미한 것이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로 유대교가 발전해온 것은 바로 이들의 노선을 따라서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경건과 엄한 윤리표준, 그리고 더 잘 알려진 가혹한 율법주의에 계속 강조점을 두어 왔다. 그들은 다른 유대인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존경은 받았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당시 또 하나의 주요 분파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지기 정치적인 이점을 교활하게 이용하여 유력한 지위를 확보해 두었던 부요한 지주회(유대 최고 종교회의)에서 바리새파와 거의 대등한 의석수를 차지하고 있었다(행23:6-10). 대제사장들 중 상당수가 사두개파였거나 친사두개파였다. 그들의 종교적인 입장은 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이외의 어떤 계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멸과 부활, 천사와 귀신들을 믿는 신앙과 같은 보다 최근의 관념들을 배격하였다. 이 점에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입장을 달리하였다(막 12:18,행23:8). 하나의 귀족적인 소수 공동체로서 그들은 일반 사람들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하였다. 상당히 그늘에 가리워져 있던 이 "분파"는 1947년 이래 사해사본의 발견과 더불어 극적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사해사본은 사해에 가까운 광야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던 한 은둔종파인 쿰란 사회의 도서관에서 나왔다. 비록 이 종파가 엣세네파였는지는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가 없을지라도 분명히 유사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종파는 달리는 알려지지 아니한 "의의 선생"에 의해서 필시 B.C. 165년경에 창건되어 A.D. 68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유대 반란 사건 때에 파멸되었다.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을 포함한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다 그들의 원수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빛의 아들들"로서 "어두움의 아들과"의 최종적인 전투에서 마땅히 그들의 것이 될 승리와 통치권을 쟁취할 날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 동안에 그들은 성경연구에 골몰하고, 엄한 은둔 생활 훈련을 하며, 그들끼리는 서로 사랑하고, 밖에 있는 모든 자들은 철저히 미워하면서 그들 스스로를 지켜 나아갔다. 그들은 정성을 다하여 상세한 성경주석들을 펴내었고 구약의 모든 문구들과 구절들을 그들의 처지와 기대하는 것들에 적용하였다. 그들은 두 메시야 곧 아론의 (제사장적인) 메시야와 이스라엘의 (왕적인) 메시야-어쩌면 두 역할을 겸한 한 메시야-의 강림을 고대하였다. 쿰란 문서가 그 종파 자체에 있어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나 그것은 예루살렘의 유대교와는 아주 거리가 먼 하나의 금욕적이면서도 묵시적인 유대교의 경향이 또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예루살렘의 유대교는 이 고립된 집단의 유대교보다도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다. 1947년 이전 같았으면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유대인들"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려 했을 것이나 이제는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열심당 :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로마의 통치를 최대로 이용하려 했고, 또 쿰란 사회가 하나님의 강권적으로 개입하여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리라는 꿈을 가졌던 반면에 많은 유대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구원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뒤에 와서 열심당으로 불리게 된 이 집단은 유대백성의 혁명군이요 자유의 투사들이었다. A.D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건을 초래한 대 반란의 불을 붙인 것이 바로 열심당이었다. 예수 당시에도 실패로 끝나긴 했으나 이미 산발적인 반란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행 5:36-37참조. 필시 바라바도). 또 백성들도 반란을 일으킬 태세가 되어 있었다. 애국심에 불탄 열심당원들은 로마에 복종하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이라는 신앙에 호소하였다. 적어도 사도들 중에 하나는 이전의 열심당원이었다.
결론 : 세례 요한은 아주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가장 알차고 보람있는 인생을 지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