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 - 노제현 선생님^^
마태복음 (2장)
본 장은 우리 구주의 유아기의 역사가 기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아기 때부터 고난을 받으셨으며, 또한 만왕의 왕으로 경배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리스도의 유년기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유년기나 나이 드실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계시며 변함이 없으십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가 노예로서 계시됩니다. 어떤 사람도 노예 따위의 유년기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유년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두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유년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서로의 관점은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도가 합당한 사람이었음을 입증합니다. 예수의 인성을 증거하는데 주력합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지만 사람됨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율법대로 할례를 받았고,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첫째 날이 아닌 여덟째 날에 예수라 이름하였습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 갔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남자이면 일년에 삼 차 절기에 참석해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를 충실하게 따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신체적으로 자라셨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럽게 보이셨다고 합니다. 이런 기록들은 예수님이 전형적인 사람이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는 아기 예수가 하나님 백성들의 왕이심을 보여 줍니다. 누가는 이런 요점들을 포함하지 않지만 마태는 누가가 지나친 점들을 섬세하게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장은 구약의 모든 세대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포함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오셨습니다. 그분은 인성 안에 이끌리셨으며 땅 위에 나타나셨습니다. 2장은 그 주님을 발견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인성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스도를 발견하느냐 하는데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제 2장을 요약하면, 1. 동방 박사들이 메시야를 찾아 옴.(1-8) 2. 그리스도께 경배를 드림.(9-12) 3. 아기 예수님의 애굽으로 피신(13-15) 4. 베들레헴의 아기들의 학살(16-18) 5. 아기 예수님의 귀환(19-23)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메시야는 유대인의 소망이었음에도 실제로 그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대대적인 환영은 없었고, 오직 소수의 소외된 사람들만이 그를 맞이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 처음으로 경배를 드린 사람들은 목동들이었습니다(눅2:15).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따라 만왕의 왕을 찾아 온 시기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열국의 패권을 잡고 헤롯이 예루살렘에서 분봉왕으로 있을 때에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박사들이 몇 명인지 그 박사들은 누구이며 그 별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 관하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1. 그들은 이방인들이었으며, 유대인의 일반적인 축복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유대인의 세 가지 감사). 2. 그들은 박사들이었습니다. 3. 그들은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4. 그들은 별을 보고 왕이 나실 것을 알고 경배하기 위해 왔습니다. 호기심의 충족을 위하여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되면 추측이거나 거짓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우리도 침묵해야 합니다. 구구한 해석을 필요로 할 때 벌써 우리의 신앙은 성경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가르침들을 따르게 되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박사들에 대해 좀 알아보면 첫째,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전해진 설화에 의하면, 그 박사들의 이름은 캐스파, 밀초어, 팔다사였습니다. 페르시아인이며, 마니교도들의 선생들입니다. 그들은 천문학을 연구하는 점성술사들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페르시아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좌우편에 있었고, 태양신을 경배하며 일월성신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별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하며 설교했습니다. 그 종교의 우두머리들은 천문학사들이었으며, 그들의 교당은 천문대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향할 때에, 동방에 유명한 선지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발람입니다. 모압왕 발락이 발람을 청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케 한 것은 성경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민22-24장). 발람은 브올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신에 감동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저가 지금 없으나 내가 보고 저가 가깝지 아니하나 내가 바라보도다 한 별이 장차 야곱의 집에서 나옴이여 한 홀이 장차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리로다(민 24:17)." 세째, 주전 700여 년부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동방 각처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동방의 문학 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통하여 옛날 동방의 선지 발람의 예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곧 하늘에서 거명성(巨明星)이 뜰 때에 유대에서 세계적인 대왕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 동방의 박사들은 새로 뜨는 큰 별을 먼저 찾으려고 각처에서 하늘을 관찰하며 별의 길을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경로로 왕이 탄생할 것을 알고 별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의 나신 곳을 탐문할 때 온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현재 유대인의 왕으로 실질적으로 유대를 다스리고 있는 헤롯 왕이 있는데, 이런 질문을 했으니 소란스러워질 법도 하겠지요. 새로운 왕의 탄생에 대하여 헤롯 왕은 불안에 떨었고(헤롯은 이두매인으로 유대인의 왕으로서 정통성이 없음), 백성들은 헤롯 왕에게 동조했습니다. 그것은 헤롯의 폐위를 반대한 것이라기보다, 헤롯을 보다 더 잔인하게 만들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헤롯은 전에도 과대망상증이라는 병 때문에 이미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살해한 적이 있습니다. 매튜 헨리는 다른 해석을 하는데, 이미 유대교의 기득권을 가진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이 허물어질까봐 메시야의 나심을 반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왕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모든 대제사장이라고 한 것은 대제사장을 지낸 여러 사람들을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종신직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율법을 어기고 대제사장직 제도를 제 마음대로 바꾸어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임명하고 또는 해임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 선생들을 말합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태어나실 장소를 알아내었는데, 그곳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의미인데, 이곳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며,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어진” 참 만나이신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께 경배 드리기 위해 떠나는 박사들을 은밀히 불러 헤롯 왕은 자기도 경배 드릴 수 있도록 왕을 보거든 돌아와 알려달라고 합니다. 헤롯은 이 일을 대제사상들이나 서기관들에게도 숨겼습니다. 이상한 것은 헤롯이 심복을 딸려 보내거나 미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은 약 7마일 정도밖에 않되는 거리입니다. 만일 헤롯이 이와 같이 했다면 손쉽게 아기 예수를 해칠 수가 있었을 텐데요. 이것은 미스터리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대적자들의 눈으로부터 교회를 파괴할 수 있는 쉬운 방법들을 숨기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왕들을 망하게 하실 때에는 그들의 판단을 어리석게 만드신다는 사실입니다. 또 헤롯 왕만 사람을 딸려 보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 중 누구도 박사들과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박사들에게는 이 사실이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도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러 왔는데, 진정 유대인들의 심드렁한 태도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가 번지 수를 잘못 짚었나?”하는 생각도 들었을 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길을 나섰을 때, 다시 그 별이 나타나 베들레헴의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떠나가 혼자 남게 되어도 말씀에 비추어 확실한 하나님의 뜻은 계속 해야 하겠습니다.
박사들은 예수님을 찾았을 때 정중하게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세 가지 예물을 드렸는데 황금, 유향, 몰약입니다. 황금은 왕이신 그리스도께 공물을 바친 것이고, 유향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바쳐진 것으로 그 향기로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며, 몰약은 장차 죽으신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바친 것으로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박사들이 바친 황금은 조공을, 유향은 존경을, 몰약은 보존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예물들의 성질로 보아 황금은 왕권을, 유향은 신성(神性)을, 몰약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박사들은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 후 헤롯에게 가지 말라는 지시를 듣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대개 정직하고 선한 사람들은 남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쉽사리 믿고, 실제로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런 지시를 받지 못했으면 박사들은 헤롯에게 돌아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렸겠지요. 오늘날도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비둘기처럼 순결하되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박사들이 왕에게 돌아가지 않은 것을 왕과의 약속을 어긴 것으로 해석하는 박 영선박사는 악한 사람과 부지중에 맺은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주석하였는데, 그것은 그 약속을 지킴으로 더 큰 죄악에 빠지거나 악한 사람을 돕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매튜 헨리는 박사들이 왕과 약속한 증거를 본문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혹시 약속을 했더라도 중동지역의 문화인 ‘하나님이 허락하시면(인샬라)’라는 조건을 달아 약속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으므로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발견 되셨습니다. 이 발견은 어려움을 초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어려움을 사용하여 아기예수를 애굽으로 옮기십니다. 호세아 11장 1절은 예수를 애굽에서 부르리라고 예언했습니다. 만약 베들레헴에서 발생한 어려움이 아니었더라면 주께서 애굽으로 피할 어떤 근거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애굽으로 피하셔야 할 근거가 되는 헤롯의 박해를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현몽합니다. 헤롯의 음모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케 합니다. 박사들은 헤롯 왕을 찾아간 큰 실수를 하였지만 예언을 성취할 기회가 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실패가 변하여 성공이 되게 하십니다. 애굽은 역사적으로는 출애굽 사건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예표론적으로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애굽은 항상 [이 세상과 그 부요]의 표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애굽에서 떠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십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서 경배하던 기쁨은 순간이고 대신 헤롯의 핍박에 대한 공포가 찾아 왔습니다. "일어나" 이 말은 즉시 떠나라는 뜻입니다. 요셉이 애굽을 향하여 떠난 것은 밤이었습니다. 그 일은 또한 즉시 수행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사람들은 이 모든 일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밤에 요셉은 어린 아기와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필이면 ‘애굽으로 피신’하게 하셨을까요(매튜 헨리)? 애굽은 우상숭배와 폭정,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것으로 유명하였고, 이스라엘에게 애굽은 “종 되었던 집”이었으며, 특히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에게 매우 잔인했던 나라였습니다(모세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예수님의 피난처로 선택되었는데,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신다면 최악의 장소로 하여금 최선의 목적을 위해 쓰이게 하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1.이것은 요셉과 마리아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의 구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수치스럽게 피신할 방법 외에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하는 점과 피신이 최선의 선택이라면 하필 애굽인가? 2. 애굽에로의 피신은 우리 주 예수님이 낮아지신 겸손의 한 실례가 됩니다. 태어나실 때 베들레헴에 누우실 방이 없었던 것처럼 유대 땅에는 그가 조용히 계실 곳이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3.애굽으로의 피신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무시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시입니다.
헤롯 왕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심히 노하였습니다. 시간적으로 예수님은 한 살도 채 못되었을 것입니다. 헤롯 왕은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게 했습니다. 헤롯 왕이 얼마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는지는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어린이를 모두 죽이게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베들레헴의 인구가 약 2,000여 명이었으므로 죽임을 당한 어린이는 20여 명 정도로 추정합니다. 너무도 끔찍한 일입니다. 만인의 생명을 살리시려고 오신 주님을 향하여 사탄은 이와 같이 어린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어디로 피신하셨는지 베들레헴의 주민들이 알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헤롯 왕의 칼날이 다가왔을 때에 제 자식을 살리기 위하여 일러 바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밀하게 예수를 피신시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의 주민들은 자기의 자식들이 왜 살육 당하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체 금 쪽 같은 자식들을 잃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법적인 권력을 가진 자가 그의 분노를 절제하지 않고 횡포를 부리게 되면 때때로 터무니없는 잔인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신 것은 불의한 일이라고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들어온 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사망이 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유아 학살 사건에 대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먼저, 순교를 당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어린 아기들은 후일 그들을 위해 피를 흘려주신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들레헴 주민들이 당한 이 큰 슬픔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멸시한 데 대한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자들이 그들에게 전해 준 소식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기쁨으로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눅2:18). 유아 학살 사건에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가 있음을 주장하는데, 구약의 모든 예언에 의하면 메시야의 탄생장소는 베들레헴이며, 그 시기는 이 무렵이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이제 이 시기에 베들레헴 부근에서 태어났던 사내 아이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으므로 예수님 외에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유아 학살이 실제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로 유명한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이 사건을 취급하지 않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요세푸스가 저술한 시기는 마태보다 훨씬 뒤의 일이며 유대교(바리새파) 유대인이었던 그는 기독교의 역사를 옹호하고 싶지 않아 누락했을 것이라고 합니다(매튜 헨리). 박 영선박사는 헤롯이 영아 학살을 비밀리 시행하여 요세푸스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경위야 어떻든 요세푸스의 역사서에 이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여 이 사건의 사실성을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 보다 인간의 역사서를 우위에 두는 것은 성경을 멸시하는 인본주의적인 생각의 발로입니다.
마태는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 같은 무참한 사건에 대하여 예레미야의 예언(31:15)을 들어 그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예레미야 31장에서 인용한 이 예언은 실상인즉 예레미야 당시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 모든 포로들을 라마에 끌고 와서(렘40:1) 그곳에서 그들을 그가 원하는 대로 죽이거나 사로 잡아 갔을 때 성취되었습니다. 그 때 라마에서의 통곡 소리가 베들레헴까지 들렸습니다(이 두 고을은 하나는 유다 지파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베냐민 지파에 속했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라헬은 야곱의 아내로 그에게는 요셉과 베냐민이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자손을 위한 조상의 슬픔이요 또한 패역한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슬픔이기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시적으로 나와 있으므로 벌써 오래 전에 죽어 무덤에 잠자고 있는 라헬이 마치 살아서 슬퍼하는 것 같은 표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베들레헴 땅에서 또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헤롯 왕에 의해 벌어진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은 그리스도께서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오신 사건인데,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시 돌아오셔야만 했습니다. 헤롯은 유아 학살 사건 후 오래지 않아 죽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3개월 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와 “아기의 생명을 찾던 자들이 죽었음”을 알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자 즉시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헤롯 대왕이 죽고 그의 세 아들이 그 부친의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아켈라오는 유대 사마리아와 에돔을,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빌립은 이두매와 드라고닛 지방을 각각 차지하였습니다. 요셉이 아켈라오가 다스리는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들어가기를 무서워하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살았는데, 이는 선지자로 하신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것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11:1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줄기를 히브리어로 ‘네체르’라 하였는데, 네체르는 또한 ‘나사렛 성’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가지라고 한 것은, 1.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온 가지 곧, 이새의 아들 다윗의 왕통이 끊긴 자리에서 다시 왕으로 나신 분을 의미하고, 2. 가지는 미천하다는 뜻도 가지는데(사53:2)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셨으나 그곳에서 장성하시지 않고, 나사렛이라는 이름없는 곳에서 미천하게 자라셨습니다. 3. 이 가지의 하시는 일은 쓴 물을 변화시켜 달게 하고(출15:25), 만국을 소생하게 합니다(계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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